귀국 전에 한나절 정도 자유가 주어졌어요. 저녁 비행기였거든요. 저(30대, 쫄보, 위험회피형 인간)는 해외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, 어느 정도 이 도시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용기가 생기더라고요.
홀로 택시를 잡고 한 달 내내 마음에 두고 있던 오래된 요새에 올라갔어요. 봄을 한껏 들이킨 하늘은 물감처럼 파랗고, 하얀 돌바닥에 반사된 뜨거운 햇살에 눈이 부시는데, 공기는 차갑고 투명해서 저 멀리 설산이 돋보기를 댄 듯 선명히 보였어요.
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데, 이 하늘 아래, 이 요새 위에, 저 설산 앞에 내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게 몸으로 느껴지더라고요. 그 순간 나도 모르게 ‘나 지금 행복하네’ 생각했어요. 생애 두 번째 행복 자각의 순간이었지요.
이상한 건, 내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마음이 슬프더라고요. ‘겨우 두 번째 행복이라니! 이마저도 곧 잊히겠지’하는 생각도 있었지만, 무엇보다 ‘내게 행복이 드문 이유가 다름 아닌 나 때문인가?’하는 생각이 들어 그랬어요. 행복은 웬만한 감정보다 더 추상적인 무엇이라 행복하려면 '이건 행복이야.’ 인정하는 마음이 필요한데, 저는 행복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더라고요.
행복의 요소인 설렘, 안도, 기쁨, 즐거움 따위에는 늘 절망, 불안, 슬픔, 무료함이 앞서곤 한다는 것을, 그래서 행복에는 긍정적인 감정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요.
아무튼 결론은 제가 조금 더 자주 행복하기로 했다는 거예요. 내 마음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때에도 행복할 수 있도록 연습해보려고요. 신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피조물의 행복이 아닐까요? 당신이 만들어 놓은 나는, 당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, 이렇게 행복하다.